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레즈네프 독트린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이 독트린은 그해 8월에 [[소련군]]이 [[체코슬로바키아]]에서 일어난 [[프라하의 봄]]을 막기 위해 군사개입한 것을 정당화하는 주장이다. 독트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. > '''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.''' [[사회주의]]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[[자본주의]] 국가로 바꾸려고 하거나 [[공산권]] 국가가 종주국인 소련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면 그 해당 국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진영 모두에게 문제가 되므로 소련은 '''[[장태완|그 해당 국가로 전차를 몰고 가서 반동분자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려도]] 문제될 것이 없다'''는 주장이다. 물론 국제법상으로는 엄연한 내정간섭이지만 당시 소련이 최전성기였던 데다 이미 [[냉전]]이 굳어진 시점이었고 [[미국]]은 [[베트남 전쟁]]에 시달렸기 때문에 서방 국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비난밖에 없었다. 역설적으로 보면 서방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이럴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. 그리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그 당시의 미국도 따지고보면 남말할 처지는 못되었던 것이 브레즈네프 독트린만큼은 아니더라도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국가, 중동 등에 내정간섭을 한 경우가 많기도 했다. [[그레나다 침공]] 사건이나 [[인도네시아]]에서 [[수하르토]]를 지원하면서 100만명 이상이 학살당하는 일을 방조한다든가, [[칠레]]의 군부 쿠데타를 사주해서 [[피노체트]]가 집권하게 된 일이 대표적이다. 또 마르크스 사상에는 [[만국의 노동자여, 단결하라!|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할 것을 요구]]하는 [[국제주의]]가 명시되어 있으므로 서방의 비판 이외에 [[제2세계]] 내부에선 명분상 문제가 없었다. 결국 소련은 기어코 [[바르샤바 조약기구]]의 20만 대군을 체코슬로바키아에 파견하여 [[폴란드군]]과 [[헝가리군]], [[불가리아군]], --[[국가인민군]]--[* [[http://www.radio.cz/de/rubrik/sonderserie68/nva-truppen-machen-halt-an-der-tschechoslowakischen-grenze|동독 군대인 국가인민군의 개입은 "나치 독일의 침략을 재현"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음을 우려한 브레즈네프가 막판에 중지시켰다.]]]으로 [[프라하의 봄]]을 잠재워 버렸다.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특히 스탈린 사후부터 소련과 거리를 조금씩 두던 [[중국]]은 이를 사회주의적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소련이 제국주의로 타락했다고 맹비난했다. [[중소결렬]] 이후 계속 악화되던 [[중소관계]]는 결국 1969년 [[중국-소련 국경분쟁]]에서 폭발했다. 물론 소련도 직접 개입은 부담이 컸는지[* 위성국이라고 해도 주권이 인정되는 주권 국가였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는 남발하기에는 부담이 컸다. 서방만큼은 아니라도 [[바르샤바 조약기구]] 역시 그 나라 국민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요구되는 데다 혼란이 장기화되면 미국이나 유럽이 손을 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.]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적용된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[[1980년대]] 중반 이전까지는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는 중앙유럽 국가에 대한 압박 용도로 활용되기도 했다. 그 예로 폴란드에서 [[1980년]]에 [[레흐 바웬사]]를 중심으로 결성된 [[폴란드 연대노조]]가 총파업을 일으켰을 때 이 독트린에 의거하여 소련군이 출동 준비를 갖추고 폴란드 정부를 압박하자 이에 폴란드 군부가 스스로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바웬사를 비롯한 폴란드 자유노조원들을 체포한 것을 들 수 있다. [[1988년]] 3월에 일명 '신사고(新思考) 외교'[* [[미하일 고르바초프]]가 집권하면서 소련이 펼친 외교정책. [[신사고 외교]]를 주창한 소련 정부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철폐, [[소련-아프가니스탄 전쟁|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철수]], 동서대립의 해소, 동구권의 민주화와 [[독일 재통일|통일]]의 용인, [[핵무기]] 감축 정책을 펼쳤다.]를 펼치던 [[미하일 고르바초프]]가 [[유고슬라비아]]의 [[베오그라드]]를 방문하여 발표한 소련의 새로운 외교방침인 이른바 '신(新) 베오그라드 선언'에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부정함으로써 이 독트린은 비로소 폐기되었고 이후 동구권 민주화의 불씨를 당기게 되어 [[동유럽 혁명]]으로 이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